"리영희", "김우창"과 같은 노학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1)한자어와 개념어를 마구 사용하여 상당히 잘 읽히지 않는다 (2)근데, 그들이 쓴 글에는 평생을 지켜온 신념이 묻어있고, 그래서 상당히 호소력이 있다 는 느낌을 받는다. 솔직히 삼인의 동시대인 총서 시리즈의 노학자(중진들의 글들도 여럿 있다)들 모두 그렇다. 여튼, 띠엄 띠엄 읽어 온 김우창의 글들을 저자의 몇 가지 의도에 의해 주욱 나열해 놓았다는 데서, 그의 사고의 흐름과 현재 천착하는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주는 장점인 것 같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말은 사실 이제 좌파의 믿음과 결별한 듯 느껴진다. 자본에 의한 세계화(경제 일방주의적인)가 진행되면서 진보라는 단어에 대한 대중들의 의미짓기 자체가 바뀌어 버린 것은 아닐까? 유한한 인간, 자원 속에서 무한을 꿈꾸고, 꿈꾸도록(소비하도록) 부채질하는 자본이 제시하는 방향성이 이제 ‘진보’라는 단어의 내용을 채워버린 것은 아닌지? 마구 뻗어나가는 자본은 국가라는 단위를 넘어섰을 뿐 아니라, 아마 지구라는 한계도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국제 자본으로 성장하고픈 우리의 대기업들도 광고에 그렇게도 열심히 ‘진보’, ‘전진’, ‘세계’를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놀랍게도 국민총생산이 1인당 미화 1만 달러 정도에 이르고 나면 물질적 성장이 개인들의 평균적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하고 소득이 커질수록 개인들의 상대적인 빈곤감이 더 커진다고 한다. (『혁명을 팝니다』를 보시라)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경제가 어려우니까’, ‘더 잘살아지면’을 외친다. 자본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마저도 그렇게 외친다. 그럼 그들은 단순하게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사실 개개인은 실용과 개성을 쫒을 뿐 아니라 자본의 일방주의 논리에 저항하는 현명한(smart) 소비자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보드를 타는 청년들을 본적이 있는가? 대형 건물 앞의 광장에 설치된 벤치와 화단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넘을 뿐 아니라 때로 지나가는 행인과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면을 연출하며 비껴간다. 덕분에 이런 친구들은 거의 한 시간에 한 번쯤 경비원에게 쫒겨난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다. 자정이 넘으면 아예 그 자리는 완전히 그들의 세상이 되고, 특히 초보들에겐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기술을 연마하는 장이 된다. 이 친구들이 침흘리는 곳은 익스트림 샵이다. 외국 대회에 다녀온 팔뚝에 멋진 문신을 새긴 선배가 사용하는 보드의 놀랍도록 부드럽고 빠르게 회전하는 바퀴가 너무나 부럽다. 그런데 보드와 보드 문화는 어디서 어떻게 나왔을까? 처음 보드/보더은 1980년대 초반, 미국 서해안 도시들에서 빠른 속도와 아슬아슬함을 내세워 도로를 점령하며 자본-산업주의 도시 내부에 균열을 내고 싶어하던 반문화의 상징(하드코어 펑크와 함께)이었다. 개인들은 각자 자신을 내세우는 개성있는 그림과 의상을 입고 길거리를 활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드 문화는 대학가와 청년들을 중심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보드 패션을 만드는 기업이 나타났다. 대안적이고 반문화적인 이 기업은 주류가 되었고, 회사 내부의 문화가 얼마나 진보적인지 모르지만 그들이 만든 상품은 주류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되어 버렸다. 아예 후에는 익스트림 파크를 만들어서 보더들을 그 안에서 ‘노는’ 녀석들로 만들어버렸다. 한강 시민공원 어딘가에도 대표적인 익스트림 스포츠 브랜드(그들도 분명 시작에선 "나이키"에 대한 저항이었다) "EXR"이 찍힌 보더들을 위한 몇 개의 트랙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보더들은 여전히 길거리에서 아슬아슬함을 즐긴다. 보더들은 거대 도시와 건축물들이 만든 규칙에 저항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가 실재로 거대 자본의 공간에 작은 균열을 내겠다는 생각을 가졌건, 아니건.
이런 식으로 "아르마니"의 수석 디자이너들은 반문화의 선봉장이지만 엄청난 부와 주류 문화의 중심에 서있다. 남들과 다름을 찾는 것은 행복을 찾는 방식중의 하나다. 획일화에 대하여 우리는 그토록 거부하지 않는가. 나 역시도 그렇고. 그런데, 문제는 다름에 대한 추구는 완전한 자급자족이 아닌 이상 시스템(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간에)의 논리에 따를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보드를 만들 수도 없고, 아니 만든다해도 기존 부품을 모아 다른 조합을 만드는 것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방식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보드가 정착되면 우리는 균열과 스크레치를 남기기 위해 새로운 무엇을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몇 년 후면 이것은 다시 기성품이 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혁명이 없는 반문화의 몸짓은 영원히 자본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하지만 이 시대에 현실적으로 혁명이 가능할까? 아니, 시대가 혁명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김우창의 책은 자본의 전지구화와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갈등에 대한 하나의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바로 ‘한계를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찾는 능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진보의 가치는 자본주의의 제어할 수 없는 발전의 논리 안에서 찾아서도 안되고 찾을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완전히 부정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반문화의 논리 안에서 찾으려 무리수를 던져도 안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진보는 능률이라는 관점을 견지한 속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그는 유럽식 수정-자본주의의 허상에 대해서도 통렬히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어설픈 타협의 진보가 아니라 진정 인간, 인민을 위한 능률을 찾는 진보를 얘기하는 것이다.
참 재밌게 읽었던 『네 멋대로 써라』의 저자 "데릭 젠슨"은 자신이 죽을 날을 알게 된다면 마지막 날 연어들을 막고 강을 죽이는 초대형 댐에 폭탄을 짊어지고 들어가 연어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고 썼던 것이 생각난다. 문제는 여기에는 댐을 하나 부순다고 체제가 바뀌지도 않으며, 오히려 덕분에 더 많은 연어와 사람과 나무와 집과 강이 엉망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가 없다는 데 있다. 즉 그의 해결 방식은 전혀 능률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이다. 뮤지션이 이 얘기를 노래했다면 난 좀 더 공감한다. 음악은 글과 달리 훨씬 더 감성적이며 폭발적인 무엇을 필요로 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이성과 냉철함을 잃어버린 글은 독자에게 순간의 기쁨이 될 망정 두고두고 남는 무엇이 될 수 없다. (음악이나 영상과 정 반대의 감상을 남기는 것이다!!!!)
물론 대추리에서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사건을 보면, 일방주의와 폭력만을 준비하는 정부와 살면서 능률적인 고려만을 하고 살 수는 없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한국사회는 여전히 신념으로 활활 타오르며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수직적이고 일사분란한 행동가들의 문화가 가치있고 절실한 곳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각 개인들의 삶이 모인 전체를 바라 볼 여유, 김우창의 말에 따르면 ‘보편성’(인류학에서 말하는 상대주의와 크게 다른 얘기는 아닌 듯하다)을 시급히 필요하다. 보편성이 필요한 이유는 “군은 시위대에 발포를 했어야 했다”는 개소리 하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인간이 존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진보 진영의 도덕적 우위와 같은 얘기로는 개소리의 근본 원인을 풀 수 없다. (지만원의 경우는 걔의 생각이 바뀌기를 기대하기보다 빨리 관속으로 들어가기를 기원하는게 현명해 보이지만) 좀 더 폭넓은 보편성, 그리고 그를 통한 존중의 방식(능률을 고려하는 합리적 문화)이 우리 문화 내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수직적-폭력적 사회문화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수직-폭력적 정부/사회구조에 수직-폭력적 저항으로 만들어낸 사회가 수평-합리적인 곳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에도 얘기했던 선생들에게 찝짜 붙던가, 아님 학교를 때려치고 그 억압에서 벗어난 친구들이 만들어낸 문화 역시 억압적이었던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진보의 비 상식적인 수준의 도덕에 대한 강조는 그만하자. 그건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을 쳐다보는 (돈에 팔려 영혼도 뭐도 없는 껍데기만 조선 사람인 미제) 그 눈길만으로도 족하다. 그들에겐 도덕적 우월감이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동아줄이니 그거 지켜줘야지.
한국 사회는 이미 1인당 국민소득 미화 1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박탈감과 불만족 속에서 살아간다. 자본의 교란 때문에 그렇다고 단순하게 끝맺을 수 없다. 급속하게 경제적인 성장과 풍요를 이루는 한편 신념으로 민주주의를 만들어 온 숨가쁜 시간 속에서, ‘한국 문화는 상대주의적인 가치를 카울 틈이 없었다’ 혹은 ‘능률적인 사고 방식을 가져볼 시간이 없었다’고 얘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는 없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물질/경제적으로 부족(한 듯 느끼)고, 민주화 역시 정착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앞서 말한 보편성과 능률을 여유를 찾은 후 다시 이야기하자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보편과 능률의 가치는 물질적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가 구현된 이후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고 방식과 문화 체계의 구성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내면화되어, 지금의 불행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진실한 ‘진보’는 다시 시작된다.
Posted by 헤비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