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는 천하다. 그래서 역사가 싫어하지.
부귀란 놈의 개와 영화란 놈의 개가 맛나게 먹던 뼈를 뱉는구나.
Posted by 헤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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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돌리다보니 군필자에 대한 가산점 문제에 대한 토론이 있다. 잠깐 보다가 어짜피 둘 사이에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기에 그냥 끄고 들어왔다. 그러다 잠시 물 마시러 마루에 나간 김에 잠시 TV를 틀어봤는데, 여전히 그대로다. 여전히 극우로 보이는 변호사 아저씨는 "니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주 근본적으로는 군대가 사라진 세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징병제는 극복이 되어야겠지. 그러나 내가 군가산제에 대해 잠깐 떠들고 싶은 것은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군필자에게 주어지는 가산점이라는 것이 과연 진짜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혜택인가하는 점이다. 또 하나는 '군대'라는 얘기만 나오면 무조건적으로 '당연히 혜택을 줘야 한다'고 말하게 만드는 '군대-국가수호'를 둘러싼 국가에 대한 신성성이다. 두 번째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면서도 좁은 시각에서 보면 핵심에서 먼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마지막에 간략하게 적어보겠다.
우선, 과연 국가기관이나 몇몇 기업에 입사할 때 총 점수의 2%를 가산점으로 주는 것이 군필자들에게 진실로 혜택인가부터 생각해보자.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면 군가산제는 물론 혜택이다. 아니 특혜도 이런 특혜가 없다. 동점을 받은 여성, 장애인, 기타 모든 군미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동점의 군필자가 그냥 얻게되는 2%의 점수는 엄청나게 커다란 특혜이다. 그러나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면 국가기관이나 몇몇 (대)기업에 진출하지 않는 남성들에게 군가산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
특히나 예술이나 창조적 사고를 요하는 집단에겐 전혀 의미가 없다.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지원자처럼 (경제건 인적 자본이건간에)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겐 이 가산점이 혜택이지만 비권력 지향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종류의 혜택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그러면 예술이나 권력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영역까지도 모두 군가산제를 실시하면 된다고? 그 얘기는 나찌가 '의지의 승리'같은 영화를 보여주며 예술도 나찌의 품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승화되었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비교하는 것은 그만두자.
그럼 창조적인 것과 직업은 특수하다고 치고, 그와 상관없는 직장을 찾는 일반적인 남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전체 직업에서 5%도 되지 않는 군가산제를 실시하는 몇 개의 직업에만 목을 매라는 말이 된다. 그럴 듯 해보이지만 그 상위의 직종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조건을 갖춘 남성은 전체에 몇 %나 될까? 그들에게 무조건 상향지향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입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프로레탈리아여, 모두 화이트칼라가 되어야 한다' 혹은 '프로레탈리아도 대기업과 중앙 지향이 아니면 2등 프로레탈리아로 떨어져라'는 얘기란 말이다. 입사시에 주어지는 그 군가산제가 아닌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는 실질적 도움이 필요하다.
아주 현실적인 얘기를 한 번 해볼까? 내가 있었던 통신병과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도저히 억지로 그 생활에 맞출 수 없었지만, 그 생활(통신 장비를 만지고, 수리하고, 기계의 구조 배우는 걸 즐기는)에 잘 맞는, 혹은 흥미를 가진 친구들도 분명 있었다. 그들에게 군대 내에서 몇 가지 테스트를 통과하면 관련 자격증이나 자격증에 준하는 이력으로 인정해주는 것은 어떨까? 물론 이 과정이 지금의 군대처럼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해서는 안된다. 군 과정을 자신의 경력으로 삼고자 하는 지원자에게는 공정하고 엄격한 능력 검증을 해야 한다. 물론, 지원자에게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 투자할 일정 시간을 군대가 보장해야겠지. 그렇다고해서 이러한 자격을 지원치 않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고. 여기에 기본이 될 수 있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병과를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지원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과의 후배들을 보니, '국군 전사자 발굴'의 발굴병으로 일 한 뒤, 약간의 경력이 되기도 하더라)
더 나아가 군대의 병과 역시 좀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야 한다. 군대에서 포스터 그려서 휴가 나오던 나의 경험은 내가 미술을 잘 해서가 아니라 미술을 전공했거나 관심있는 사람이 자신의 적성을 살릴 수 있는 병과가 없기 때문에 빚어진 나에게 우연히 주워진 기회였다. 군대에 그렇게도 많은 표어와 포스터가 필요하다면 그러한 일을 하는 병사도 뽑고 이들의 경력을 인정해주는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들의 예술혼을 엉뚱하게 낭비하는 현실은 좀 미안하더라도, 최소한 총에 기름칠하며 모든 색은 국방색과 갈색, 검정으로 시야가 막히게 살아가는 2년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잠깐 내가 들어본 예와 같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군필자에게 줄 수 있는 인센티브들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국가기관과 (요즘은 국가와 같은 대접을 하는) 몇 몇 대형기업의 입사시험 당시만 혜택을 주는 군가산 제도는 오히려 더 차별을 공고히 할 뿐이다. 권력 지향의 직업을 남성으로 채우고, 그 권력이 다시 군대라는 기준에 의해 균일화 된 남성이 세습케 하여 그 권력이 획득한 이익을 다시 자신들 안에서만 배분하는 차별의 제도화 말이다. 그러한 방식에서 여성, 장애인, 군미필자, 비권력지향의 남성(혹은 권력지향을 하더라도 조건을 갖추지 못한 남성)은 영원히 차별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엘리트와 2등 시민을 나누는 무서운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이길 수 밖에 없는 헤게모니 쟁탈전을 하겠다는 거지)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그거 아는가. 한국 군대는 얼마 전까지 혼혈인을 받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혼혈인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급(기지촌을 생각하라)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 차별을 더 공고히 시켰던 것이 군대였다. 소방관, 경찰도 다르지 않았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런 군가산제는 차별과 구분을 공고히 하는 것일 뿐 군필자를위한 진정한 혜택이 아니다. 좀 더 현실적인 혜택, 그리고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들도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배려가 필요하다.
둘째 문제는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다. 『상상의 공동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국가라는 것이 개인 위에 존재하는 신성한 것이 아님을 많은 지식인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교육은 국가의 신성성을 주입하고 있으며 언론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국가가 신성해지면 당연히 국가와 관련된 일은 신성해지고 이를 관리 혹은 이에 동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권력 역시 신성해진다. 이런 사고의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군대와 관련된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 조차도 불가능해진다.
좀 다른 쪽으로 빠진 이야기 하나 하겠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386세대들이'국가와 민족을 위해 민주화에 나섰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직도 민주화라는 것이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 민이 주인이라면 국가는 민과 민 사이, 그리고 민들과 국가 사이의 계약에 의한 것이란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민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권리도 갖는다. 즉 국가는 민보다 상위의 개념, 즉 위가 아니라 동일한 것이며, 국민국가에서 민주주의를 획득하고자 하는 목적은 국가와 민 사이의 계약관계를 다시 확인하고 틀어질 경우에는 정상화하는 것이다.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 개개인을 위해 민주주의는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군대 역시 민과 국가 사이의 계약을 통해 만들어 진 것이다. 이것을 의무로 만들었다면 (상황이 어쨌 건 우선 의무가 되었다면) 계약이 재조정되거나 파기될 때까지 민은 군대를 가야한다. 그러나 이는 신성한 무엇이 아니라 계약의 이행이다. 군대, 국가, 민족에 대한 신성성이 제거되지 않는 한, 앞서 말 한 '너희가 몰라서 그렇다'는 식의 논리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억지를 위한 억지(신성한 국방의 의무와 신성을 다한 사람에 대한 (그 안에서도 다시 차별을 키우는) 혜택이라는 식)가 힘을 얻게되는 것이다. 신성의 영역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하느님이 행하는 데 이유가 있던가, 부처님의 뜻에 논리가 있던가)이다.
부디 군가산제와 같은 개소리 좀 사라졌음 좋겠다. 그리고 반드시 혜택이 필요하고 주고자 한다면 일반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이유와 방식으로 하자. 차별을 키우고 강제로만 집행하는 그런 거 말고. TV토론 이라는 것도 이런 상식을 좀 깔고 하면 안될까.
나의 최대 단점은 생각나는 대로 그냥 마구 지껄인다는 것이다. 흥분을 잘하기에. 하지만 흥분한 채라도 말은 해야겠다. 어짜피 나 혼자 떠드는 공간에서 혼자의 생각을 - 그래서 이 게시판의 이름이 '끄적끄적'이지 않은가 - 주저리 적어봤다. 사는 거 참 답답하다.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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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개강인데, 28일까지 마감인 원고도 있는데, 암 것도 안 하면서 잠도 오지 않는다.
Jack Johnson의 따스한 음악을 듣고 있지만 자꾸만 음악 밖을 상상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에 있다보면 남들과 조금 다른 통과의례를 거친다. 나에게는 6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입사 의례가 있다.
개강이라는 이름의 입사 의식이다. 늘 새로운 시작은 설레이면서 떨리는 법.
행당캠퍼스에서의 첫 강의, 문화인류학과가 아닌 학과의 수업을 듣기(학부 때를 제외하곤 첨이다).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내일 저녁엔 데프콘 인터뷰도 있구나. 사실 전혀 바쁘지 않은데, 맘은 늘 바쁘다.
내 맘이 바쁘게 느껴지는 건, 틀에 박힌 어떤 미래에 대한 그림이 나에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대중음악과 이 사회 사이에서 고민하고 의미를 찾고 다시 그 의미를 재생산하는 글쟁이.
글쟁이가 되겠다는 꿈, 그것 하나만 분명하다. 아카데미아에 있다고 해서 대단한 무엇이 되려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되기도 불가능에 가까운 구조아니던가.
그래, 미래가 선명치 않기에 나는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지 않겠다.
언제나 새로운 길을 걷겠다.
그 길이 어떤 길이건,
예전에 한 음악하는 선배 아버지 상을 당했다고 해서 새벽까지 자리를 지킨적이 있었다.
난 너무도 존경하는 그 선배를 보면서 난 늘 생각했었다.
저런 선배도 이상을 향해서 저렇게 척박한 삶을 웃으며 견디는데, 난 뭐냐고.
근데, 그 형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비죠야, 형은 널 보면 늘 이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거 같아서 보기 좋다."
그날 내가 술을 조금 더 마셨더라면 울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또 내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뻔한 삶을 뻔하게 살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Posted by 헤비죠
(2006, 캐나다, Eagle Records/Egg Music)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음반은 누가 무슨 확신을 가지고 라이센스를 할까? 블루스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의 상황에서 '비비 킹(B.B. King)'이나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급 뮤지션도 아닌 양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영화 『로드 하우스(Road House, 1989)』에서 기타를 눕힌 채 마치 '도브로' 연주하듯 환상적인 슬라이드 사운드를 들려주던 맹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제프 힐리(Jeff Healey)'. 「Angel Eyes」나 리메이크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등으로 1980년대와 90년에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꽤나 이름을 날렸던 양반이다. 그의 음반을 그것도 그의 전성기가 한참 멀어진 2006년 가을에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음반을 듣다보면 꽤나 거친 그의 손맛이 귀로 전달되는 쾌감을 만끽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라이브 임에도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 꿈의 무대 중 하나 아니던가) 말끔한 소리에 더 기분 좋아진다.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의 음반들이 미국서 재발매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부터다. 그러나 이게 한국서 정식으로 발매가 되다니.... 얼마나 팔렸을까 궁금하다. 하지만 좋은 음악은 반드시 좋은 귀를 가진 음악팬을 만나게 마련이다. 나 같은 막귀에도 걸려들 정도면 고수들은..... (어쩌면 고수들은 이미 미국반으로 가지고 있으려나?)
블루스와 하드록의 경계에서 날카로운 기타와 깊은 감성,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기에 더 손이 예민한 기타리스트의 개성을 느끼고 싶어질 때 듣지 않을 수 없는 음반. '도어스(the Doors)'의 원곡이자 영화에 등장했던 「Road house blues」가 흐르기 시작하면 관객들의 환호는 더 커진다. 나의 귀도 더 쫑끗 세워진다.
2007년이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손이 예민했던 제프 힐리처럼 내 길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고 아름답게 싸워나가는 한 해가 되길.....
Posted by 헤비죠
2주간의 분노와 화해
8월 13일 도쿄에서 야스쿠니 참배 반대 집회에서 시작되어 8월 25일 홋카이도 최북단 사르후츠무라에서 강제징용 노동자 유해발굴로 마무리된 2006년 8월의 2주일은 내리쬐는 햇살보다 더 뜨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동아시아 공동 워크샵 참가자들은 이 시간의 의미와 감동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동아시아의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만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고민의 시작에는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공유하지만 매듭짓지 못했던 하나의 슬픈 역사가 놓여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일본이 아시아를 침탈했던 사건입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의 선량한 국민들은 물론, 홋카이도, 오키나와, 조선, 대만, 중국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혼란으로 몰아갔습니다. 원치 않는 전쟁으로 내몰린 아시아의 사람들,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억지로 끌려가야 했던 노동, 성(性)유린, 민족 파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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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연행된 조선인의 사무친 낙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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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연행 조선인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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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도 워크샵 유해발굴 | ⓒ김성용, 1997 |
아시아를 재앙으로 몰아갔던 제국주의 일본은 미군의 원폭투하 이후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원폭으로 인한 피해를 내세우며 자신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아시아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갔던 제국주의의 핵심 세력(전범)들을 일본 수호 전쟁신으로 모시며 국가 지도자들이 나서서 참배하고 받들고 있습니다. 더욱 경악할 것은 억울하게 끌려갔던 아시아 사람들의 유해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일본의 책임이 아니라며 보상과 유해 반환을 거부하면서, 전쟁에 내몰렸던 아시아 각국의 전사자들의 영혼은 ‘일본인(식민지 일본의 주민)’인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쟁신으로 만들어버린 사실입니다. 일본 전쟁신을 모시는 제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에는 수 천명의 아시아인들이 유가족의 동의나 허락 없이 무단으로 합사되었있습니다. 이는 제국주의의 망령 속에 억울한 영혼마저 얽혀놓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2006년 8월 한국, 일본, 대만, 오키나와 시민들은 도쿄 시내에 모여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정치지도자들에게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와 아시아인들의 무단 합사를 반대하는 뜻을 강력하게 전달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항의의 몸짓이 아닙니다. 일본의 우경화와 제국주의화를 그대로 두고보지 않겠다는 아시아 시민들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땀이 줄줄 흐르는 8월 중순의 도쿄를 아시아의 시민 천 여명이 함께 촛불을 들고 거리를 걷는 것은 일본 역사 상 보기드문 강력하고 힘찬 모임이었습니다.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은 일본 언론들이 이 행동에 주목한 것도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얼마나 아시아 각국의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는지를 일본 언론들도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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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로 동아시아 평화의 연대를 꿈꾼다| ⓒ김두진,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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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명의 함성이 도쿄의 거리를 삼켰다 | ⓒ김두진,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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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나서기 전 모습 | ⓒ김두진, 2006 | 동아시아 평화를 위하여 | ⓒ김두진,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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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야스쿠니에 | ⓒ강현진, 2006 | 평화의 촛불을 | ⓒ강현진, 2006 |
8월 15일 저녁,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참가자들은 도쿄를 떠나 일본 최북단의 작은 마을 사르후츠로 향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분노했던 그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되어 일본군 비행장을 짓다가 쓰러져간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발굴을 위해 한국과 중국 뿐 아니라 150여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발굴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발굴이 진행되고 몇 점의 뼈조각으로 남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찾아가면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화해하는 법을 배워갔습니다. 일본의 건전한 사고를 갖는 시민들과 함께 삽질을 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한, 중, 일의 과거에 대해 토론을 하며 함께 미래를 향할 것을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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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전 교육 | ⓒ김하늬,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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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유해를 앞에두고 제를 올리는 스님들 | ⓒ김하늬,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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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갈비뼈와 엉덩이뼈 | ⓒ한양대학교 박물관 유골발굴단,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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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된 유골조각, 사발, 병 | ⓒ김성용,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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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된 유골조각 | ⓒ김성용,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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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된 유골조각 | ⓒ김성용,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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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유해 | ⓒ박재현,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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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식소로 옮겨진 유해 | ⓒ김하늬,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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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유해분석 | ⓒ충북대 유해발굴센터, 2006 |
정치적 노선, 이념, 사고방식을 떠나 순수한 인간에 대한 존중과 예의! 우리는 같은 아픔의 역사를 가졌던 아이누들을 만나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키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과거에 대해 냉철히 고민하는 젊은 일본 대학생들을 만나 역사의 매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더 철저하고 엄밀하게 과거에 대한 진상을 밝힐 때, 더 큰 화해와 진정한 동반자로서의 신뢰가 시작됨을 함께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노 뿐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함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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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가운데 발굴 준비 | ⓒ김하늬,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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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참가자 | ⓒ김하늬, 2006 | 일본 참가자 | ⓒ김하늬,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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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모습 | ⓒ김하늬, 2006 | 토론 모습 ⓒ김하늬,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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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하는 일본 참가자 | ⓒ김하늬, 2006 |
정말 무더운 8월이었습니다만, 우리는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더 뜨겁게 고민하고, 더 치열하게 싸우며 서로를 보담을 방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좀 더 정교하게 동아시아의 과거를 발굴할 상시 운영 기구를 한, 중, 일 정부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오르는 가슴을 가진 동아시아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공식적이고 항구적으로 일제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찾아내고 보상하는 기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8월이, 그 아름다운 기억이 한 번의 지나가는 타오름으로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들이 동아시아의 더 크고 환한 미래를 비추는 횃불의 첫 심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느 유족분의 말씀이 생각합니다. “이렇게 학생들이 나서서 우리 아버지를 찾는데, 정부는 무얼했나?” 그렇습니다. 이제, 이 일에는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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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주민과 유족의 만남 | ⓒ김하늬, 2006 | 발굴현장에 오신 유족분들| ⓒ김하늬,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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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로 옮겨지는 유해 | ⓒ김하늬, 2006 |
Posted by 헤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