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예선 때도, 일본하고 하던 경기들은 다 재밌었다. 특히 오늘 일본이 9회에 홈런 칠 때가 경기의 절정이었다. 손에 땀을 쥐게하는 승부. 누구 말대로 '야구는 9회 2아웃부터라는' 바로 그 묘미가 느껴졌다. 누가 이겨도 이렇게 재밌는 경기를 봤다면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거기다가 한국팀이 이겼다. 좋더라.
근데, 끝나고 난 후 무서워졌다. 맹목적인 국가주의가 이렇게 무비판적으로 폭발하는 데 소름이 쫙 돋을 만큼 떨리더라.
그 절정이었던 '태극기를 마운드에 꼽는다.... 그리고 감동 받는다'.
그래... 이긴 팀이 자신들의 상징을 놓을 수도 있지. 며칠 전 함께 술을 마시던 선배의 얘기가 떠올랐다. 우리(그 선배와 나)는 너무 민족주의의 악몽을 두려워 한 나머지 그냥 좋아할 수 도 있는 지점도 과잉반응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자는 그 말. 그래서 태극기를 마운드에 꽂아 놓은 점을 이해하려고 했다. 근데, 가만 가만 어떤 팀도 한국시리즈 우승 후에, 마운드에 팀의 깃발 꼽아놓는 세리머니 본 적이 없는데.....?
이겼다! 좋아! 태극기(팀의 상징물 아닌가!) 들고 경기장을 돌아! 좋아! 열심히 응원해 준 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해! 좋아! 근데, 왜 그것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일까? 굳이 경기장 땅을 파고 흙을 긁어다가 태극기를 심어 놓아야 하는 거지? 그 논리는 무엇인가? 그 경기장은 영구히 한국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마운드를 봉쇄할 것인가? 이 지점이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재밌고 멋진 경기를 하고도, 단지 경기에 졌다는 이유 만으로 욕 밖에 할 수 없는 일본 선수들도 마찬가지. 이건 스포츠이지 않은가? 경기이지 않은가? 경기에 졌다고 선수들을 욕할 수 있는가? 최선을 다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던가? 국가라는 이름의 팀이 국가 그 자체가 아니며, 그 승패가 국가의 존망이 아니지 않은가. 왜 일본 애들은 물론이고 우리도 국가라는 말이 앞에 붙는 순간, 이성을 잃어야 하는 것인지....
태극기를 마운드에 꽂은 것은 어쩌면 이제 전 세계 야구계에 있어서 승리 세리머니의 새로운 이정표를 연 것이 될 수도 있으니... 어쩌면 우리는 올 연말이면 한국 시리즈에서 또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팀이 자신들의 팀 깃발을 마운드에 꽂는 장면을 당연하게 보게 될 지도 모르니까, 그 얘긴 그만하자.
그러나 국가라는 이름 앞에 광기에 가까운 감정 이입은 한 발 물러서서 냉정히 생각하자. 우리가 박수를 보내야 하는 대상은 9회 말까지도 승부를 알 수 없도록 멋진 경기를 연출해 준 양 팀의 선수 모두이지, 절대로 한국 선수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 선수들을 두고 왜 그렇게 '죽일 놈, 살릴 놈'하면서 광분해야 하나?
국가주의. 내가 아니면 모두 적. 우리, 생각을 좀 바꿔보자. 미국의 선수는 열심히 뛰러 나온 선수다. 일본의 선수도 마찬가지. 한국의 선수도 당연히! 그들은 야구를 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시민(돈도 좀 많이 번)일 뿐이다. 그들 중 누구도 우리의 적이 아니며, 나 자신과 동일한 무엇도 아니다. 그 팀이 국가가 아니다. 또한 국가는 내가 아니다. 내가 국가가 아닌 것처럼.
월드컵 때, 내 차를 누가 올라타서 부숴도 '한국이 이겼으니까 좋아하던', 그리고 남의 차를 올라타고 밟아 부숴놓고도 '한국이 이겼으니까 좋아하던' 그 국가-민족주의의 광기는 쉬지도 않고 우리의 이성을 잘도 찢어놓는다. 무서울만큼......
사족을 하나 더 붙인다.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지금은 기아지만)가 상대방의 연고지에서 승리하면 버스가 나갈 수 없도록 사람들이 둘러싸고 욕을 했더란다. 요즘은 모르겠다. 내가 프로야구를 좋아라하던 시절이 거의 10년도 더 옛날 얘기니까. 그렇게도 상대방 선수들을 참지 못하던 그 팬들이 국제 경기에만 나가면 광주일고 선수도 대구 사람들이 목놓아라 응원을 하더다. 그리고 언론은 '이 알흠다운 모습'을 운운하기 바빴고. 그들이 그렇게 싫던 도시의 애들도 외국이라는 또 다른 가상의 적(상대팀 선수는 그저 선수일 뿐이다) 앞에서 하나가 되었다.
지역주의도 싫지만, 그렇게 골수까지 미워하던 사이도 껴안게 만든 국가주의는 더 살벌하지 않은가? 당신도 그것이 아름답고 건강한 조국애로 느껴지시는지?
Posted by 헤비죠


